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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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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엄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5-08-07 16:38 조회4,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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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에 비친 샤자한의 사랑이야기

 

뭄타즈 마할이 두 번째의 왕비로서 아그라성에 들어온 것은 17년 전이었다.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키도 작고 피부도 까만 전형적인 드라비다 여인이었다.

첫 번째 왕비나 세 번째 왕비의 미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여인.

굳이 좋은 점을 찾자면 맑은 목소리와 넘치는 애교, 그리고 꾸밈없는 밝은 성격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성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입궐 후에도 다른 왕비처럼 거드름을 피우거나 사치스럽지도 않았다.

왕비의 품위를 잃지도 않으면서도 늘 밝게 웃으며 매사를 솔선수범함으로서 대신들과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샤자한의 마음을 읽는데도 탁월해서, 언제나 황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마술처럼 알아 맞추고는

그를 대신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언제나 황제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사는

그런 여인이었다.

 

어느덧,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이 있거나 언제나 뭄타즈를 동반했다. 그녀는 심지어 황제가 전쟁터에

나갈 때도 두말없이 따라 나섰다.

사랑이란 외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뭄타즈마할의 헌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두 왕비의 따가운 눈초리와 질투를 감수하며 뭄타즈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샤자한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따르는 착한 그녀를 혼신을 다해

아끼고 사랑했다. 다른 왕비들처럼 남을 비방하거나 험담하는 일도 없었다.

 

뭄타즈는 또한 샤자한에게 결혼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17년 동안 무려 14명의 자식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내,

그 이름 뭄타즈 마할이었다.

 

그런 왕비가 또다시 임신한 채 만삭의 배를 끌어안고 끝내 몸져누운 것이다.

이전과 달리 점점 야위어져 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은 샤자한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창백한 달빛이 아그라 성의 테라스에 걸친 어느 날 밤, 결국 뭄타즈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 곁에 앉아있는 샤자한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그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의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노라고.”

뭄타즈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 줄 것을 황제에게 부탁하였고”,

그는 죽어 가는 왕비의 손을 잡으며 굳게 약속했다. 1631년 6월 7일의 일이다.

뭄타즈는 14번째의 아이를 낳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마침내 황제의 곁을 떠나게

되었고, 황제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장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 흰 상복을 입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했다.

 

샤자한은 뭄타즈 마할 사후 곧바로 그녀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이로서 아그라의 야무나 강남쪽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역사적인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름은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왕관모 습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스만투르크제국 최고의 모스크 전문 건축가 우스타드 라호리가 초빙되었고,

아지메르 지방에서 최고급의 흰 대리석들이 재단되어 속속 아그라로 도착되었다.

 

인도 전역에서 내노라하는 조각가들이 불려 졌고, 이탈리아와 터키,

심지어 남미산 유색 대리석과 오닉스가 수입되었으며, 루비와 사파이어,

그리고 옥이 중국과 아라비아 등지에서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2만 명의 노예들이 건축가의 지시를 받아 무려 22년간의 대 공사 끝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무굴 제국의 영광과 샤자한의

명예에 걸 맞는 아름다운 자태로 창조되었다.

 

놀랄 정도의 섬세한 조각과 백색의 대리석에 홈을 파서 유색의 대리석을 잘라

상감 처리한 정교한 기술은 더 이상의 다른 건축물과의 비교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코란을 새겨 넣은 높은 대리석 기둥은 밑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시각적으로 맨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정확히 같은 너비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판의 너비와

글자를 넓히고 크게 새겨 넣은 그 세심함은 감탄사만으로는 부족하다.

 

본관의 주위에 높이 솟아있는 네 개의 미나르(첨탑)는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으며,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한 믿어지지 않는 설계와 시공기술에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은 중앙운하에 한가로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본관의 맞은편에

열려있으며,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이여.

가히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타지마할이 건설되면서 죽은 후 2년 동안 그 앞뜰에 임시로 묻혔던 뭄타즈마할은

바닥 공사가 끝나면서 바로 타지마할의 지하에 옮겨졌다.

타지마할이 완성되는 날, 샤자한은 성대한 행사를 갖고 뭄타즈마할의 영혼을 다시 위로했다.

죽은지 23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생전의 왕비를 사랑하는 샤자한의 눈에 뭄타즈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있었다.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후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리움은 다시 고통으로 다가왔다.

황제는 타지마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

조부인 악바르 대제 시절의 한때 수도였던 파테푸르 시크리로 6개월간의 휴가를 떠난다.

샤자한이 대리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병적이다시피 했으므로,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는

파테푸르 시크리 성내에 자리하고 있었던 성자 시크리의 초라한 무덤을 대규모의

대리석으로 증축하고 공간을 확장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1년에 한번씩은 이곳을 순례하도록 하였다.

 

그는 뭄타즈마할이 없는 아그라에 머물기보다는 외부에 출타하는 일이 많아졌고,

이윽고 조부 후마윤의 수도였던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샤자한은 장차 이슬람세계의 끝까지 그 명성을 떨칠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붉은 사암의 거대한 성, 이른바 '랄킬라'를 짓기 시작했다. 성안에는 인도에서 가장

큰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마마스지드이다.

 

샤자한이 제국을 통치하던 30년간, 제국의 확장에 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타지마할의 건설로

국고가 결국에는 바닥을 드러내게 됨으로서 그의 업적이 빛을 잃게 되었다.

말년에는 중병에 들어 국사를 돌보기가 힘들어 지게 되었고,

왕비 뭄타즈마할에 대한 그리움으로 야무나 강북쪽 타지마할의 반대쪽에,

이번에는 검정대리석으로 타지마할과 같은 거대한 자신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제의 임종과 국고의 탕진을 염려한 네 아들이 서로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 군인기질이 가장 풍부한 야심가 아우랑제브가 장남과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재빨리 아그라를 차지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쥐게 된다.

그는 아버지 샤자한을 아그라 성채의 작은 방에 감금하고는 아버지가 진행시키던

샤자한의 묘의 건축을 중지시켰다.

 

무려 8년이라는 기간을 이곳에 갇혀 살던 샤자한은 75세의 나이로 멀리 야무나강 너머의

타지마할을 바라보면서 쓸쓸히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사후 그의 묘는 타지마할 지하의 뭄타즈마할의 관 옆에 안치되었다.

뭄타즈마할에 대한 샤자한의 사랑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타지마할 만큼이나 불가사의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하루에도 네 번씩 색깔을 바꾼다는 타지마할의 자태는

고요한 달빛에 비칠 때면 보라 빛을 띤 상아색으로 바뀌고,

그 고운 모습은 마치 샤자한과 뭄타즈마할의 달콤한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아그라 성채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면, 멀리 떨어진 타지마할을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타지마할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샤자한의 애절한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랑을 논하려면 아그라를 먼저 가 보라.

사랑과 애달픔이 곳곳에 스며있는 곳.

아그라는 그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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