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각황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보물 지정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가람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1-09-09 09:08 조회3,491회 댓글0건본문
각황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전체) / 화엄사
[법보신문] ‘조선의 미켈란젤로’ 색난 스님의 대표작 보물된다
기사 원문 바로가기>>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416
문화재청, 8월31일 지정 예고 발표
덕림사·능가사·은하사·화엄사 등 4건
“뛰어난 장인, 교장, 조묘공으로 불려 ”
신묘한 조각 솜씨로 ‘조선의 미켈란젤로’라고 일컬어지는 색난 스님의 대표작 4건이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8월31일 색난 스님이 조성한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 4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색난 스님(色難, 1640~?)은 17세기 후반에 주로 활동한 조각승이다. 정확한 생몰연대와 행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관련 기록 등을 통해 1640년 전후 출생해 1660년대 수련기를 거친 후 1680년 수조각승이 돼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40년 넘게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시기 조각승 중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보통 유명 조각승이 평생 10건 내외의 작품을 남겼지만 색난 스님의 작품은 현재 알려진 불상만도 20여건이다.
문화재청은 “당시 사람들이 색난 스님이 조각한 부처님을 선호했고 스님의 조각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면서 “이런 이유 때문인지 스님은 솜씨가 뛰어난 장인이라는 뜻의 ‘교장’(巧匠) 또는 ‘조묘공’(彫妙工)으로 불렸다”고 설명했다.
‘광주 덕림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색난 스님의 현존작 중 가장 이른 시기 조성됐다. 수조각승으로 활동했던 40대인 숙종 6년(1680) 조성됐으며 총 26구로 구성된 대규모 불상군이다.
현실감 있는 얼굴의 굴곡, 도드라져 보이는 코, 넓고 낮은 무릎 등 안정되고 아담한 조형미를 추구해 초기 제작 경향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17세기 후반 조각승들이 추구한 미의식이 투영돼 있으나, 세부 표현에는 색난 스님의 개성이 드러나있다. 이러한 특징은 색난 스님이 17세기 후반 불교조각의 새로운 양식을 주도해 나갔음을 보여준다.
‘고흥 능가사 목조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일괄’은 능가사 응진당에 봉안된 불상이다. 능가사는 스님의 본사이자 활동의 근거로 삼는 곳이었다. 능가사 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은 스님이 오래도록 머문 사찰에서 진행된 대규모 불사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685년 6월 전라도 홍양현(洪陽縣) 팔영산(八影山) 능가사(楞伽寺)의 상기(尙機) 스님이 발원했고 색난 스님이 수조각승으로서 도반‧제자들과 함께 만들었다. 석가여래,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삼존상에 문수·보현보살, 아난·가섭존자가 6대보살로 이뤄지는 등 응진전 조상으로는 보기 드문 구성이다.
주요 존상이 결실되지 않고 거의 완전한 구성을 갖는 것도 특징이다. 나한상의 표정과 몸짓이 지물과 어우러져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어 예술성이 탁월하다. 나한의 얼굴과 세부표현에서는 응원(應元), 인균(印均) 스님의 조각 전통이, 대좌의 바위 형태와 동물의 활용한 기법에서는 무염(無染) 스님의 영향이 보인다. 이에 능가사 불상은 색난 스님의 조각 형성과 발전, 사승(師承)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가다.
‘김해 은하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일괄’은 주로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색난 스님이 경상도 최동부 지역인 김해 지역에 조성한 불상이다. 색난 스님의 전성기 활동 영역을 파악하는 기준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 불상은 숙종 18년(1687) 제작돼, 김해 신어산 서림사 시왕전(현재 명부전)에 봉안됐다. 명부전 존상은 모두 21구로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귀왕, 판관, 사자, 금강역사 등 거의 완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특히 시왕상의 관모(冠帽, 모자)와 발거치대는 용, 봉황, 코끼리, 사자 등 다양한 동물을 수용해 창의적이고 새로운 도상을 창출했다. 조각기법 역시 정교하고 섬세해 색난 스님의 전성기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다. 형태의 비례나 양식에 있어 아담한 체형을 추구한 17세기 후반의 조각 양식과도 공통된다.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색난 스님의 만년작을 대표한다. 40여년 수화승으로 활동한 색난 스님의 마지막 시기 해당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숙련된 기량과 원숙함이 반영돤 기념비적 대작이다.
화엄사의 역사에 있어 각황전의 창건과 불상 조성은 가장 핵심적인 불사라 할 수 있다. 전각 이름도 왕실로부터 하사받아 장육전에서 ‘각황전’으로 변경됐다. 불상은 1703년 숙종,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경종(당시 세자), 숙빈최씨(숙종의 후궁), 영조(당시 연잉군) 등을 비롯해 여흥민씨, 해주오씨 등 권세 있던 가문의 인물들이 불상 조성에 대거 참여해 조성했다. 이에 18세기 초 최대 왕실불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불상의 평균 높이는 3.3m다. 거대한 이층전각 목조건물인 각황전 규모에 맞게 웅장한 형태로 조성됐다. 주존불인 석가여래삼불좌상은 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신체에 비해 크고 각진 얼굴이 압도적이다. 반면 삼불좌상의 좌우에 서 있는 사보살상은 역동적인 아름다움이 묘사됐다. 신체와 얼굴도 비례한다. 여래와 보살이 대조를 이루며 서로 다른 조형성은 전각 내부를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끄는 것은 색난 스님의 우수한 감각이 드러나는 기법이다.
동시에 색난 스님과 제자들이 왕실발원 불상 조상에 초빙된 것은 스님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현재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에 따르면 7존(尊)의 불보살상은 1703년 10월4일에 수조각승 색난 스님을 중심으로 제자 충옥, 일기 스님 등 24명이 협업했다. 특히 석가여래좌상은 색난 스님이, 다보여래상과 문수보살상은 충옥 스님이, 아미타여래좌상은 일기 스님이, 보현보살상은 웅원 스님이, 관음보살상은 색난과 추붕 스님이, 지적보살상은 추평 스님이 각각 주도해 조성했다.
문화재청은 “색난 스님의 4건의 작품은 △관련 자료를 통해 조성시기와 배경, 제작자를 명확하게 알 수 있고 △동일작가의 작품 중 대표성과 상징성이 있으며 △주요 존상의 결손이나 변형이 적어 완전성이 뛰어나고 작품성도 우수한 사례고 △제작 당시부터 원봉안처를 벗어나지 않아 유래가 뚜렷하다는 점 등에서 보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600호 / 2021년 9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